류아와의 인터뷰는 3월 29일 동작구 대방동에 있는 허름한 카페에서 진행되었다. 굳이 허름하다고 표현한 이유는 그곳이 실제로 카페에서 다방으로 넘어가는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걸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후 5시쯤 만나서 사람이 가장 없을 것 같은 그곳으로 이동했다. 그를 처음 봤을 때 왠지 어디에서부터 급하게 달려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실제로 그가 달려왔다는 것은 아니었는데, 나는 인터뷰를 마치고서야 그가 오늘의 만남을 위해 근무시간을 조정해야 했다는 점, 그리고 그 근무가 종일 서서 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인터뷰는 대략 2시간가량 진행되었고, 이 지면에서는 대화 내용을 최대한 편집 없이 그대로 싣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스카(이하 ‘스’) : 류아님, 안녕하세요. 제가 사무실에만 있으니까 좀이 쑤셔서 한달에 한번 사람들 만나면서 겸사겸사 바람이나 쐬려고 인터뷰코너를 만들었어요. 그렇다고 엄청 거창한 인터뷰는 아니니 긴장하지 마세요.

류아(이하 ‘류’) : 긴장 하나도 안 했는데. 질문이 어차피 다 거기서 거기 아니겠어요?

스 : (웃음) 알았습니다. 이름은 본명 외에도 여러 가지 활동명을 사용하시는데 뭐로 부르는게 좋을까요?

류 : “류아”로 해주세요.

스 : 네, 알겠습니다. 류아는 만약 “무엇을 하는 분이시죠?”라고 누가 물어보면, 즉각적으로 뭐라고 답변할 거예요?

류 : 뮤지션이요. ‘생계형 뮤지션’. ‘생계형 뮤지션’이라는 게 뭐냐면 음악을 가장 본업으로 하고 싶지만 생계를 위해서 무한 알바 인생을 살아야 하는 그런. (호탕한 웃음). 지금도 알바를 하고 있기도 하고요.

스 : 그러니까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해서, 생존을 뒷받침하기 위한 다른 일이 필요하신 상황인 거죠?

류: 네, 그게 (기간이)꽤 됐죠.

스 : 언제부터 생계형 뮤지션이 되신 건가요?

류 : 음악을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한 뒤부터죠. 저는 음악을 하기로 마음먹으면서부터 계속 아르바이트 인생을 살았어요.

스 : 지금까지 어떤 아르바이트 인생을 사셨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류 : 맨 처음 했던 것은 전단지 아르바이트였는데 잠깐 하다가 그만뒀어요. 그리고 과외는 꾸준히 계속했었다가 지금은 안 하고. 서빙 했었고요, 서빙은 지금도 하고 있고. 편의점 했었고, 텔레마케팅 했었고요. 또 이 텔레마케터가 ‘인바운드’랑 ‘아웃바인드’랑 달라요.

스 : 어떻게 달라요?

류 : ‘인바운드’는 보통 홈쇼핑 쪽에서 많이 하는 방식인데요, 광고를 보고, 구매 의사가 있는 사람이 먼저 전화를 하면 그걸 처리하는 거예요. 전화 거신 분들이 훨씬 더 호의적이죠. 왜냐하면 이 사람들은 구매의사가 있어서 먼저 전화를 했으니깐 설명도 잘 듣고, 또 구매율도 높아요. 반면에 아웃바인드는 한마디로 영업이거든요. 우리가 보통 어떤 홈페이지나 쇼핑몰 같은 데서 ‘할인쿠폰 줍니다’ 이래서 연락처 남기면 주는 쿠폰 있잖아요. 그렇게 해서 수집된 정보가 아웃바인드 목록이 되는 거거든요. 그 연락처를 가지고 생판 모르는 사람들한테 전화해서 상품을 파는 거죠. 아웃바인드가 인바운드보다 훨씬 험해요. 이 사람들은 구매의사가 없는데 전화를 해서 설득을 해야되니까 훨씬 어렵죠. 저는 인바운드, 아웃바운드 다 해봤어요. 저는 아웃바인드로 보험판매 했었어요.

오호라. 류아보다 알바공력이 떨어지는 나는 처음 듣는 사실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과외중개 텔레마케팅’, ‘학원총무’, ‘공부방 강사’, ‘사무직’, ‘포토샾 편집알바’, ‘청소알바’등 “그냥 닥치는 대로 다 했던 것 같다”는 다양한 이력의 아르바이트 경험을 들려줬다. ‘학원총무’는 실용음악과에 편입하기 위해서 음악학원에 다닐 때, 비싼 학원비를 다 감당할 수 가 없어서 본인이 먼저 학원원장님께 제안해서 없는 자리를 만들어낸 경우라고 한다. 이 대목에서 그가 생존하기 위해서 익힌 친화력이랄까 삶의 의지랄까 그런 것들이 엿보였다.

계속해서 얘기를 듣다 보니 불안정한 삶을 감수하면서까지 선택한 뮤지션의 삶에 대해서 궁금해졌다.

스 : 처음에 어떤 계기로 음악활동을 시작하게 되셨는지 궁금해요.

류 : 사실 제가 그렇게 빨리 음악을 시작하지는 않았어요. 21살. 물론 그 전에도 음악에 관심이 많았고, 배워보고 싶었지만, 본격적인 시작은 처음 다니던 대학교에서 음악동아리를 하면서 부터예요.

스 : 저는 대학 다니면서 락동아리를 했었는데(웃음), 거기는 어떤 음악을 하는 동아리였나요?

류 : 제가 있었던 동아리는 일종의 노래패. 그러니까 민중가요 동아리였거든요(웃음). 지금은 더 심하지만, 그때도 (민중가요가)사장판 이였거든요. 그런 분위기에다가 갑자기 동아리 내의 인간관계가 막 틀어지면서 힘들었어요. 왜 삶이 한번 흔들리기 시작하면 다른 일도 콘트롤이 안 되잖아요. 그래서 2학년 때부터는 모든 게 힘들어졌죠. 과공부도 힘들고, 동아리도 힘들고, 거기다가 알바는 계속해야하고. 음악이랑 학업이랑 병행하기는 너무 힘들었어요. 저희 과가 타과에 비해서 상당히 공부량이 많은 편이었는데, 저는 왕복 4시간이 넘게 걸리는 통학거리를 유지했어야 했고요.

2006년에 어찌어찌 공연을 하기는 했는데, 학점도 망하고. 그래서 장학금도 놓치고. 부모님한테 등록금을 내달라고 하기가 죄송한 상황이 된거에요. 장학금도 놓쳤고 거의 학고 직전에 점수를 받았어요. 그러던 와중에 음악은 너무 하고 싶고. 사실 어렸을 때부터 음악을 너무 하고 싶었거든요. 하여튼 그때 음악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그거에요.

빈곤프리미엄. 같은 대학에 다니면서 ‘대학생’ 내지는 ‘청년’이라고 불리지만, 그 안에서 개인이 보는 풍경은 결코 균질적이지 않다. 등록금을 걱정하고 4시간씩 걸려 통학을 해야만 하는 사람이 어떻게 꽤 괜찮은 서울 소재 4년제 대학의 건축과를 그만둘 수 있었을까. 단순히 음악이 좋았다는 이유만으로는 잘 납득이 되지 않았다.

스 : 그래도 학교를 3학년 1학기까지 다녔는데 그만뒀을 때, 아쉬움은 없었나요? ‘내가 돈과 시간을 이렇게 투자했는데’ 이런 종류의.

류 : 저는 사실 거기를 이탈한 것에 대해서는 아쉬움은 없지만 건축이라는 학문을 그만둔 것에 대한 아쉬움은 있어요. 건축학이 되게 매력적인 학문이거든요. 또 다양한 공부를 함께 할 수 있어요. 일단 건축을 하기 위해서는 그 안에 사는 사람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거든요. 그래서 인문학 공부도 해야 하고. 건물을 예쁘게 짓기 위해서는 미학, 또 건물의 의미를 설명해 내기 위한 철학, 역사도 알아야 하고, 또 생태학까지. 요즘도 학부 때 잠깐 공부한 내용을 바탕으로 가끔 (건축)전시회도 찾아다니거든요. 그런 아쉬움은 있어도 ‘꽤 괜찮은 4년제 대학’이라는 규범적 틀을 벗어났다는 것에 대한 후회는 없어요.

스 : 그런데 대신 몸이 힘들잖아요.

류 : 힘들죠. 몸은 힘든데. 그런데 그건 그 안에 남아있었어도 힘들었을 것 같아요. 그 안에 있으면 뭔가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다는 느낌이었거든요.

스 : 그런데 자신에게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껴입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거든요.

류 : 저는 정말 안 맞았던 거죠. 그 학교의 정치적 스탠스가 되게 보수적이에요. 공립이고. 공무원을 많이 배출하는 학교였고. 그랬기 때문에 학생들도 뭐랄까 되게 안정적인 생활을 추구했던 것 같아요. 지금은 대부분 학교가 그렇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그 학교가 그런 쪽으로 더 빨랐던거 같아요. ‘우경화’나 ‘보수화’ 그런 게. 저희 과가 건축 쪽이어서 되게 자유분방할수도 있었는데 그렇지 않았어요. 학생들이 추구하는 직장이라거나 목표가 ‘공사 들어가는 거’, ‘안정적인 생활’이었어요.

어떻게 보면 저랑 비슷한 가정환경의 사람들이 많았던 거 같아요. 집이 그렇게 유복하지 않은데 공부는 좀 해가지고 등록금이 저렴한데로 온 사람들. 그래서 안정적으로 빨리 자릴 잡아서 뭔가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해야 하는. 음… 전형적인 쳇바퀴를 도는 사람들?

그는 ‘자퇴’대신 ‘이탈’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곤 했다. 

스 : 거기서 이탈한거죠?

류 : 네, 이탈한 거죠. 코스에서 이탈한 거죠.

스 : (코스)그 안에서 많이 힘들었나요?

류 : 사실 동아리에서 그렇게 사람들이랑 어긋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냥저냥 맞춰서 살았겠다는 생각은 해봤어요. 동아리가 아사리판이 난 이유가 뭐였냐면, 왜 군대 가기 직전, 남자동기들의 정신 나간 행동들 있잖아요. 예를 들어 합주시간이 정해져 있는데, 밤새도록 술 마시다가, 게임방에서 게임하다가 근처 자취하는 애 집에서 다같이 자고, 다같이 늦게 일어나서, 늦게 합주하러 오고. 이게 보통 1-2시간 늦는 게 당연한거에요. 반면에 저는 타이트하게 삶을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인데, 이게 시간약속부터 틀어져 나가니까.

그리고 이게 젠더문제도 약간 있는데 저는 사람들한테 불만이 있을 때 약간 돌직구를 던지는 타입인데.

스 : 그런 부류의 여자를 처음 만나 본 거구나?

류 : 그것보다는 그들한테 있는 전형적인 여성에 대한 편견, ‘여자는 이래야 돼’ 이걸 제가 계속해서 깨는 거죠. “너 여자인데 말 너무 세게한다.”이런 식으로 반응하더라구요. 말 세게하니까 더 상처받고 그런거죠.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당시 분명히 젠더문제도 껴 있었다고 생각해요.

어쨌든 그 일 이후로 사람들이랑 함께 엮여서 무언갈 하는게 너무 싫은 상태가 돼 버려서. 그냥 보컬학원을 다니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이게 너무 좋은거야(웃음). 너무 편하고. 그래서 ‘아, 굳이 동아리 하지 않아도. 사람들이랑 부대끼지 않아도 음악을 할 수 있는데 뭐하러 동아리에 돌아가야 돼’ 이렇게 해서 휴학을 하고 본격적으로 음악을 하기로 마음먹은 거죠. 그러다가 휴학을 마치고 학교로 돌아가니까 뭔가 학교의 보편적인 정서랑 더 안 맞는 사람이 되어 있는 거에요. 그래서 자퇴를 했죠.(웃음)

그는 2010년 학교 자퇴 후, 재수끝에 보컬전공으로 실용음악과에 편입을 했다. 또 한가지 알게 된 사실은 실용음악 보컬과 경쟁이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

스 : 실용음악과로 편입하신 이후에 학교생활은 즐거웠나요?

류 : 사실 제가 다니던 학교가 OO대학교(개신교 계통의 학교) 콘서바토리(학점은행제)였거든요. 그때는 그래도 한국 보수개신교의 소위 ‘종교뽕’에 세뇌당하고 있던 터라. 경험해 보셔서 아시겠지만. 거기는 비판하면 안 되고, ‘노~오력’해야 하고, 약간 그런 정서 있잖아요. 그리고 사람들하고 두루뭉술하게 다 잘 지내야 하고. 계속 사람들에게 언제까지나 호혜를 가지고 잘 대해줘야 하고. 그런 것들.

전 당시 종교뽕에 상당히 심취해 있었어요. 아니 정정할게요. ‘심취’라기 보다는 ‘세뇌’요. 심취는 되게 뭐랄까 제가 주체적으로 그렇게 한 것 같은 느낌이고, (당시)종교교리에 세뇌당해 있었어요. 왜냐면은 제가 다니던 모교회가 예장합동, 그리고 거기서 청년부 회장도 했었고.

스, 류: 아하하하하(웃음소리)

예장합동은 한국개신교 중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교단이다. 보수적인 교단일수록 무조건적인 순종과 봉사, 헌신을 중요한 가치로 가르치곤 한다. 보통 교회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이름과 권위를 빌어서 전달되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러한 메시지를 비판하고 선별적으로 받아들이기는 결코 쉽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류아가 자신이 보수교단의 교회에서 보냈던 경험을 ‘세뇌’, 또는 ‘종교뽕’이라고 부르는 것도 일견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의 말투에는 약간의 분노도 느껴졌다.

종교뽕?

류 : 나름 신실했었고. 아침 QT 모임(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모임)도 했었고, 중고등부 찬양부도 인도했었고. 인도자 겸 밴드마스터였죠. 애들 연습 시켜가지고 매주 예배, 말이 예배지, 매주 라이브 공연을 해야 하는 거니까. 실력 안 되는 애들 다 연습시켜서 해야 하는 거니까. (웃음) 그러니까 실용음악과를 다녔다는 느낌보다는 그냥 교회의 연장선상에서 생활하는 느낌이었어요. 그러니까 인간관계에서는 그렇게 힘든 일은 없었죠.

그런데 제 마음속 깊은 곳에서 뭔가 불편함을 느끼고 있긴 했어요. 그런데 ‘교회에 대해 비판을 하면 안 된다.’라는 강력한 메시지도 함께 있었죠.

스 : 또는 비판할 수 있는 언어가 없었을 수도 있고요.

류 : 네. 맞아요. 그때는 제가 제 언어를 찾지 못한 상태였어요. 제 속에 뭔가 불편하고 뭔가 안 맞는 느낌이 있긴 있는데, 그게 뭔지 찾지를 못하니까… 일단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에 그냥 귀를 기울이고.

스 : 믿음으로 초월하고.

류 : 네, 그렇죠. 그냥 그때는 아무 불편함 없이 (학교에)다녔던 것 같아요. 주어진 상황에 대해서 치열하게 고민을 하기는 했지. ‘다음 학기 등록금은 또 어떻게 낼까?’, ‘다음 학기에는 무슨 수업을 들을까?’ 하는 그런 고민.

스 : 학교를 옮겨서도 등록금은 계속해서 이슈였군요?

류 : 네, 그렇죠. 학교에 다닐 때나 나왔을 때나 언제나 아르바이트는 계속했어요. 그런데 둘 중에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어요. 그래도 학교에 다닐 때는 제 본업이 학생이라는 생각이 강했고, 뭔가 소속감이 있었거든요. 학생의 의무라고 해야 하나, 본분이라고 해야 하나. 학교를 나와 보니까 우리나라가 (학생이라는 신분)그것을 약간 신성시한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예를 들어 알바자리를 구하지 못해도 ‘나는 본업이 학생이니까’. ‘남는 시간에는 학생의 일을 하면 되니까’. 이렇게 생각할 수 있었죠.

(학생 시기에는) 내 생계에 대해서, 삶에 대해서 온전히 다 책임을 지지 않아도 그게 사회적으로 용납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학교를 졸업하고는 그게 용납이 안 되는거예요. 더 이상 뭔가 내가 일을 못 하거나 소득이 적거나 그럴 때 어떠한 변명도 존재하지 않는. 그냥 내가 내 삶을 잘 관리를 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라고 되어 버리는… 그런 걸 경험했어요.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나는 대학 생활을 공부만 하고 지낸 적이 단 한번도 없었고,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거의 반 이상의 시간을 노동으로 보냈는데도, 그 당시에 제가 학생이었던 것은 굉장한 특권이 아니었나하는 생각이 들어요. 왜냐하면 학생이라는 것만으로 나 자신을 온전히 경제적으로 책임지지 않아도 그게 사회적으로 인정이 되고… 그리고 분명히 학생이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사회적 인프라가 분명히 있어요. 예를 들어 그래도 책을 마음껏 빌릴 수 있는 도서관이 있고, 좀 찾아보면 상담소나 그런 기능들요.

돌아보면 최소한의 ‘사회적 안전망’이라는 게 학교에는 존재했던 것 같아요. 그걸 이제(사회적 안전망이 없다는 것을) 더 실감하는 거죠. 심지어 학점은행제 학교를 다녔을 때조차도 안전망이 존재했던 것 같아요.

스 : 얘기를 들으면서 드는 생각은 청년세대가 어렵다 어렵다 하지만 대학에 가지 못한 청년들은 사회에서 호명하는 ‘청년세대’에 포함조차 되지 못하는 것 같아요. 언론에서도 거의 주목도 안 하고요. 대학진학률이 70%라고 하니까 나머지 30% 정도 되는 사람들 말이에요. 그리고 아마도 대학 내에서 말씀해주셨던 그런 최소한의 ‘사회적 안전망’이 있기 때문에 대학생들이 계속 졸업을 유예하겠죠.

류 :  맞아요. 맞아요. 왜냐하면 사회적 안전망이 전혀 형성되어 있지 않은 사회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니까. 그렇지 않아요?(웃음)

(학교)나가면은 진짜. 나가면 당장 편의점 아르바이트라도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그리고 지금까지도 우리사회에 만연한 가족중심주의적인 관점에서도 보면, 일단 학교를 다니면 ‘아직 학교를 다니고 있으니까’ 라는 식의 변명이 통하는데. 형식적으로나마. 그런데 졸업하면 아무것도 없잖아요. 내가 피부양자가 아니라 부양자가 되고. (웃음). 지금까지 가족, 부모가 자신에게 투자한 것을 갚아야 한다는 압박감 내지는 의무감이 생기고요.

같은 청년층이지만 잘 언급되지 않는 고졸취업자

스 : 음악을 본격적으로 하고 싶다고 했을 때 가정에서의 지원은 전혀 없었나요?

류 : 네, 사실 제가 (음악을 시작한)처음부터 (부모님한테)일체의 지원을 받지 않겠다고 했어요. 가장 큰 이유는 집이 지원할 수 있는 환경이 전혀 아니었어요. 아버지가 공무원이셨는데, 빚을 상당히 많이 졌었거든요.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 월급에서 대부분이 손에 만져보지도 못하고 차압당하는 것을 보면서 자랐어요. 지금 돌이켜보면 제 삶을 가장 강력하게 규정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채무자 집안에서 자랐다는 사실 같아요.

그렇다고 하루 3끼를 굶고, 그런 것은 아니에요. 어머니가 살림을 잘하시기도 했고, 옷도 깨끗하게 입고 다녔는데도, 뭔가 그때를 돌이켜보면 경제적 박탈감이 있어요. 제가 초등학교 때, 두 번 이사를 했거든요. 3학년 때, 서울에서 일산으로 이사 온다고 한 번하고. 6학년 때는 아버지 빚 때문에 아파트가 넘어가서 처음 왔던 데보다 더 변두리로 밀려났어요. 그런데 그 변두리라는 것이 하필이면 상당히 학군이 좋고, 유난히 잘사는 애들이 많이 있는 동네였던 거에요.

전학 가서 학교에 갔더니 반 애들이 막 메이커를 따져요. 애들이 제 옷에 새겨진 프린트를 보면서 막 킥킥대면서 웃고. 자기네들이 아는 메이커가 아니니까. 샤넬 브랜드를 모른다고 막 웃고. 그런데 솔직히 초등학생이 샤넬을 아는 게 더 비정상 아니에요? (웃음) 그래서 그때, 뭔가 얘네들과 내가 처한 상황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피부로 느꼈죠.

갑자기 이천 년도 초 일산 끝자락에 위치한 친척 집에 가던 길이 생각났다. 여기저기 공사가 진행 중인 건물들과 논자락 옆으로 외국에서만 보던 정원이 딸린 단독주택들이  함께 있던 언발런스한 풍경 말이다. 당시 일산에는 신도시 개발과 함께 투자 붐이 일었고, 3호선 끝자락은 손에 꼽는 명문학군이 되었다. 그때는 고교 평준화가 되지 않았던 때였고, 지금처럼 평균화 속에 차별과 혐오도 넘쳐나던 시기도 아니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토닥에 관한 질문을 하여보기로 했다.

나약함이 모여 삶을 채울 때도
삶에 지친 그댈 탓하진 않길
지친 삶의 모진 시간 속에도
걱정마요 내가 그댈 위로할테니

두려움이 모여 삶을 흔들어도
삶에 다친 그댈 탓하진 않길
아픈 삶의 짙은 시간 속에도
걱정마요 내가 그댈 위로할테니
걱정마요 내가 그대 위로가 될게

– 류아, ‘위로가 될게’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