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카

남들보다 많이 늦었다. 신체등급 1등급. 군대를 피할 방법도, 피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지만, 하고 싶은 것들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대학졸업까지 꼬박 7년이 걸렸다. 그 사이 군 복무에 대해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주변 친구들이 하나둘씩 머리를 깎고 없어져서는 몇 개월 뒤, 어눌한 말투와 새까매진 피부, 잔뜩 주눅 든 모습으로 나타나는 일이 반복됐으니까 말이다. 카투사 선발에서 한번 떨어지고, 코이카* 선발에서도 탈락하고 났더니 어느새 졸업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2008년, 더는 입영을 연기할 수 없는 나이가 되었다.

휴가 나온 친구들은 나더러 너는 절대 버틸 수 없을 거라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하곤 했다. ‘보나 마나 탈영감’이라고도 했다. 걔 중에는 ‘나이 들어 병으로 가면 험한 꼴 볼 거’니 ‘뺄 수 있으면 빼라’는 조언도 종종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이유로 장교에 지원한 것은 아니었다. 장교가 되면 무엇보다 주도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위치에 있게 될 거라는 기대가 있었다. 이왕 갈 거면 ‘빡센 곳’으로 가서 부딪쳐 봐야 한다는 생각에 해병대를 지망했다. 당시 해병대 장교지원은 항상 미달이었는데, 왜 그런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14주간의 교육훈련을 마친 후 소위로 임관했다. 첫 근무지는 포항에 위치한 부대, 임무는 병력을 인솔하는 소대장이었다. 전입신고를 마치고 얼마 있지 않아 대대장이 나를 호출해서 두 가지 명령을 내렸다. 첫째는 앞으로 소대장실이 아닌 자신의 집무실로 출근하라는 것. 둘째는 자신의 집무실에서 논문작성을 대신해달라는 것이었다. 지시사항은 매우 디테일했다. 대대장실에는 외부 인터넷망에 접속할 수 있는 노트북이 있었고, 그는 그 노트북을 이용하여 국회도서관 등에 접속하여 논문작성에 필요한 자료를 수집하게 시켰다. 더 황당한 건 이제부터인데 그는 이미 출력해서 가지고 있는 서너 가지 논문을 잘 조합해서 자신의 논문을 작성하라고 지시했다.

장교사회에서 진급은 아주 치열하기 그지없는데, 아무래도 석사나 박사학위가 있으면 진급에 유리했다. 많은 장교가 출석도 거의 하지 않는 야간대학에 이름만 올리고 있다가 어떻게든 졸업장을 따내서 진급심사에 한 줄 적어넣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내가 아는 한 우리 대대장은 수업을 제대로 듣지도 않았거니와 논문을 작성할 정도의 지적수준도 안 되는 사람이었다.

부당한 요구에 저항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당시 중대장에게 도무지 이 일은 못 하겠다고 호소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군대란 그런 곳이야”라는 말이었다. 주변의 동기들에게 어려움을 토로해도 별수 없었다. 그들은 그들대로 군대는 ‘계급이 깡패’라는 것을 하루하루 실감하며 지내던 터였다. 논문대필을 시켰던 그 대대장은 자신보다 계급이 한참 낮은 초임장교가 자신을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 일을 포함해 모든 부당한 지시들에 맞서 싸울 만큼 용감하진 않았다. 그러기에는 치러야 할 대가가 너무 컸다.

문제는 비단 상급자와의 관계에서만 일어나지 않았다. 소대장이 된 나는 내가 이끄는 소대를 최대한 수평적인 조직으로 만들려고 노력했는데 그게 문제의 시작이었다. 병들 사이에는 기수별로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들을 구별한 세세한 규정들이 ‘인계사항’이라는 이름의 쪽지로 돌아다녔는데, 내가 그것을 인정해주지 않자 병장들이 들고일어났다. 아마 청소시간에 병장들도 같이 빨래는 개게 시키거나 빗자루를 잡게 시킨 게 더 큰 불만을 일으켰는지도 모르겠다. 이윽고 인계사항에는 ‘장운영 소위한테는 경례하지 말 것’이라는 내용이 추가되었다.

병들 사이의 뿌리 깊은 서열문화, 소위 기수문화는 혼자 힘으로 어떻게 해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특히 자유가 억압당한 상황에서 발생하는 스트레스들은 부대 내에서 가장 약한 고리인 저계급자에게 집중되기 일쑤였다. 가장 흔한 폭언과 구타에서부터 라이터로 지지고, 벌레를 먹이고, 성기를 만지고, 잘 때 방독면을 씌우는 따위의 일들이 난무했다. 그런 일들의 상당수는 서로의 계급과 기수를 구별 짓기 위해서 아무 이유 없이 행해지는 경우가 많았고 이유야 만들어내면 그만이었다. 주로 피해자인 일, 이병들은 자신이 당한 불합리한 폭력에 대해 침묵하고 숨기기 일쑤였다. 아마도 내가 논문대필지시를 감찰기관에 고발하지 않았던 이유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배신자로 낙인찍히면 혹독한 대가가 뒤따랐다. 구타로 일병의 고막을 터지게 만든 녀석을 비롯해 몇몇은 영창에 보냈지만, 불안에 떠는 쪽은 가해자보다 언제나 피해자 쪽이었다. 구타당한 사실을 외부에 발설한 병들은 이른바 ‘기수열외’를 당했는데, ‘기수열외’ 당한 대원은 커뮤니티 안에서 완전히 배제되어 투명인간 취급을 받았다. 반면 폭력적이고 불합리한 상황에 침묵하거나 이를 꾸역꾸역 견뎌내는 이들은 ‘군 생활 잘한다’라거나 ‘체질’이라는 소리를 들었고, 하나같이 ‘꺾이면’ 왕처럼 굴었다.

한번은 구타 사건의 주동자가 내가 조직한 신우회**에 가장 열심히 나오는 녀석이었다는 것을 알고 충격에 빠진 적이 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우리 부대에서는 매주 일요일이 되면 일, 이병은 의무적으로 개신교 종교활동에 참여해야 했다는 것과 그 시간에 갖은 얼차려와 구타가 자행되곤 했다는 것이다. 때린 놈과 맞은 놈은 매주 교회에 마주 앉아 어떤 기도를 드리곤 했을까. 아마도 논문대필의 시련을 잘 이기게 도와달라고 했던 나의 기도와 비슷한 기도를 드리진 않았을까. 개인화된 신앙은 구조적인 모순과 조직문화를 바꾸는데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오히려 맹목적으로 교회나 선교단체에 헌신했던 사람들은 폭력적인 군대문화의 핵심인력으로 변모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그렇게 하나둘 비상식이 상식이 되어가던 와중에 또 하나의 일이 터졌다. 지금에야 페이스북이 대세라지만 당시 대세는 누가 뭐라 해도 싸이월드였다. 나도 싸이월드에 개설된 여러 클럽에 가입해 있었고, 그중 하나는 대학 시절 신앙생활을 함께 했던 사람들끼리 만든 ‘비공개클럽’이었다. ‘비공개클럽’은 클럽장의 가입승인이 있어야만 회원가입이 되었기 때문에 종종 그곳에서 남들에게는 말 못 할 고민을 나누곤 했다. 어느 날 그곳에 게시글을 하나 남겼는데, 요지는 군대생활이 힘들지만 잘 버텨내고 있으니 나를 위해 지속해서 기도해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헌병대에서 전화가 왔다.

문제가 된 것은 ‘군대 참 X같다’ 는 문장이었다. 믿을 수 있는가. 싸이월드 비공개클럽 익명으로 쓴 게시글의 내용을 군 헌병대에서 검열할 수 있다니. 휴가 중이었던 나는 그 시각으로 부대에 복귀해서 대대장과 작전과장 앞에 불려갔다. 그리고 해당 게시글 삭제는 물론이거니와 성생활 등 나의 내밀한 고민이 담긴 게시글 전체를 그들에게 보여주고 글 쓴 의도를 해명해야만 했다. 사건은 훈계조치로 일단락되었지만, 나의 게시글 일부는 군 기강 문란의 사례가 되어 해병대 내 전 부대에 뿌려졌다. 아마 제목은 “초급장교, 인터넷에 군대 비하 게시글 올려 적발” 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기분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마치 누가 강제로 나를 발가벗겨 전시해 놓은 느낌이랄까.

그렇다고 내가 마냥 군 인권침해의 피해자이기만 했냐면 또 그것은 아니었다. 나 역시 매주 부대원들의 싸이월드에 접속해서 ‘부적절한 게시글’이 있는지 조사하는 역할을 해야만 했다. 게시글뿐 아니라 부대원들의 사상도 단속대상이었다. 당시 광우병 파동 등 떠들썩한 국면 속에서 무조건 시위참석을 금지해야 했고, 주기적으로 내려오는 금서목록에 따라 책을 수거해야 했으며, 매주 정훈교육(이라 적고 사상교육이라 읽는다)을 통해 보수화된 이념을 주입해야 했다.

지금도 기억나는 정훈교육자료 1과의 제목은 ‘군복 입은 민주시민’. 얼핏 보면 그럴듯한 말 같지만, 정작 실상은 군복을 입었기 때문에 민주시민으로의 권리를 다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는 교육이었다. 이런 논리를 싸이월드 게시글 사건에 대입해 보면 민주시민으로써의 나는 피해자였지만, 군복입은 사람으로서 아주 못 할 짓을 한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내가 입고 싶어서 입은 군복이 아님에도 군복을 입었다는 이유만으로 수많은 인권이 무시당했고 야만적인 일이 당연하다는 듯이 요구되었다.

싸이월드 사건은 군 생활에 터닝포인트가 되었다. 사건 이후 내면화된 자기검열은 일상을 잠식해 들어갔다. 누가 항상 지켜보는 것 같았다. 일기를 포함해 어떤 글도 쓰지 못했다. 원래 “군대는 이런 곳이야”라고 믿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으니까. 아니 누구라도 그러지 않을 도리가 없었으니까. 그럴수록 점점 더 비상식과 야만을 견디고 참고 침묵하는 것이 익숙해졌다.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윗사람과 크게 부딪치지 않았고, 병들과도 적당한 거리에서 잘 지냈다. 그리고 별다른 사고 없이 무사히 전역했다. 그렇게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했다.

얼마 전, 오랜만에 서울에 올라온 동기를 우연히 만났다. 반가움에 카페로 자리를 옮겨 연애에서 정치로 화제를 옮겨가다가 결국 군대 얘기가 튀어나왔다. 그는 나에게 전역 후에도 지속되었던 불면증에 대해서 털어놨고,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유 없이 잠 못 들던 시간들, 종종 악몽을 꾸었고, 이를 심하게 갈아서 치료를 받았다. 그에게서 행군을 하다가 양쪽 인대가 모두 끊어져 의가사 제대를 한 동기의 이름을 들었다. 나는 스트레스로 인한 반신마비 증상으로 조기 전역한 동기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는 자리를 일어서며 군대에 남아있던 동기 한 명이 스스로 삶을 끊었다는 얘기를 해줬다. 우리 모두 무사한 게 아니었다. 그 누구도 무사하지 않았다.

군대에서 생긴 생채기들은 아물었다가도 가끔 다시 벌어져 잠 못 이루게 하곤 한다. ‘군대가 편해졌다’고 하는데, ‘옛날 군대가 아니다’라고들 하는데 무엇이 달라졌는지 얼마만큼 달라졌는지 알 길이 없다. 나도 당시에는 그런 얘기 숱하게 듣곤 했으니까. 올해만 해도 해군장교 한 명이 성폭행으로 인해 자살했고, 육군참모총장은 동성애자를 색출해서 처벌하라고 지시했으며, 많은 수의 공관병들이 노예 같은 대접을 받으며 인권을 착취당해 왔다는 소식을 접했다.

군번. 해병대 08-20115. 2008년 봄부터 2011년 여름까지 야만의 시간을 살았다. 백남기 농민의 빈소가 있었던 서울대병원에 시간이 닿는 한 자주 가려고 했던 것은 죽은 자의 몸에 여전히 가해지고 국가권력의 힘과 폭력에서 나의 이야기를 읽었기 때문이다. 폭력과 야만의 기억을 혼자 간직해서는 안 된다. 그것들은 계속해서 말해지고 알려져야 한다. 다시는 야만의 시간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살아가지 않을 것이다. 그 누구라도 야만의 시간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할 것이다. 말하고, 생각하고, 성찰하고, 글 쓰는 것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 한국국제협력단(Korea International Cooperation Agency, 약칭 KOICA)에서는 ‘국제협력봉사요원’을 선발하는데, 여기에 선발 되면 해외에 나가 병역의무를 대체할 수 있다.

** 직장에서 기독교 신앙을 공유하는 이들이 만드는 모임. 보통 정기적으로 모여 성경공부를 하거나 예배를 드린다.

*** 당시 헌병대에서는 주기적으로 작성해서 각 부대에 배포하는 사건사고 사례집 같은 게 있었다.

 


 

작가소개 및 후기

영어로 scar. 흉터라는 뜻이다. 사적인 이야기를 공적인 장에 드러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는데 글쓰기 학교를 통해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얻었다. 삶의 새겨진 흉터자국을 더듬어 더 많은 많은 얘기를 들려주고 싶다. 나와 너, 우리 모두를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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